잉여인간의 진실을 넘어서

노인=잉여인간?

오늘 직장 동료 중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출근시간대에 제발 노인들이 지하철에 안 탔으면 좋겠다고요. 그 직장 동료는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노인이 앞에 있으면 자리를 양보하기가 애매하고 짜증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출근시간대를 지나서 지하철을 탔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할 일 없으면 집에 있다가 나중에 나와도 되지 않느냐고도 말하더군요. 짜증 섞인 반응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개최한 경로행사에 운집한 노인들

 전, 그 말에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할 일이 있어서 출근시간대에 나오는 노인도 있지 않겠느냐고요. 그랬더니 그 동료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노인들 행색을 보면 할 일 있어서 나온 사람들 같지는 않다고요.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습니다. 늙어서도 지하철은 타고 싶지 않다, 추레해 지지 않기 위해서는 젊었을 때 돈을 많이 벌어놔야 한다 등등의 말들을 말이죠.

얘기는 거기서 중단되었습니다. 사실 별로 말을 섞고 싶지 않더군요. 노인의 행색으로 일을 하고 안하고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느냐, 할 일이 없더라도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것 아니냐, 집에 있기 힘들어서 나올 수도 있지 않느냐 등등의 말이 입에서 맴돌았지만, 얘기를 한다 한들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것 같아서요. 식사 시간 내내 불편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 떠들었지만, 그 동료의 말이,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는 뿌리 깊은 편견이 영 마뜩치 않아서요.

이 동료는 노인을 ‘할 일 없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 듯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쓸모없는 인간, 즉 일종의 ‘잉여인간’ 취급을 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인 노인이, 할 일 많은 젊은이들의 출근시간을 힘들게 한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죠.


늙음이 두려운 이유

사실 노인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제 동료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제 동료의 말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특히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노인에 대해 갖는 생각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공경의 대상이 아닌 짜증의 대상, 존중의 대상이 아닌 무시의 대상, 할 일 없고 추레한 사람이라는 인식.

그렇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느 때부턴가 우리는 노인을 이렇게 인식하게 됐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늙어갈 텐데 말이죠.

사람은 누구나 늙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이런 진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늙지 않을 것처럼, 또는 늙어도 우아하고 화려하게 늙어갈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어떻게 늙어갈지에 대한 고민도 별로 하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에 파묻혀 살아갈 뿐이죠. 그러나 우리가 늙어간다는 것은 변함없는 ‘참’입니다. 늙은이가 되었을 때는 젊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불편함이 물밀듯이 닥쳐온다는 것도 역시 ‘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 낮 탑골공원의 풍경

늙으면 불편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입니다. 행동도 느려지고, 기력도 떨어지죠. 기억력도 감퇴하고 잔병치레도 많아집니다. 무엇이든 견디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자신이 ‘퇴물’로 취급당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장강의 앞 물결이 뒷 물결에 밀리듯,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퇴물로서의 처지가 아마 가장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아직도 하 많은 세월이 자기 앞에 있는데도,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노인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 은퇴자, 혹은 퇴물로 자리매김합니다. 노인이 곧 할 일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전 늙는 게 두렵습니다. 죽음에 가까워졌다는 증거인 저승꽃 핀 얼굴로 살아가는 것도 두렵고, 늙은이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풍기며 살아가는 것도 두렵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퇴물로 살아가는 것도, 쓸모없는 사람 취급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두렵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무시당하며 사는 것 또한 두렵습니다.


은퇴자가 센다


이처럼 늙음은 비참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비참하지만은 않습니다. 노년의 삶을 어떻게 꾸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김수종씨가 은퇴 후 행복하면서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6명의 은퇴자를 인터뷰해 내놓은 책 <고마워라 인생아!>를 보면 늙는다는 것이 그리 비참하지도 않을 뿐더러, 젊었을 때보다 훨씬 의미 있는 삶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고마워라 인생아! (경향신문사,2009)

이 책 서두에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키케로는 노년의 삶이 비참해 보이는 이유에 대해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하고, 둘째 우리의 몸을 허약하게 하며, 셋째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며, 넷째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21쪽)

그러나 키케로는 노년이 비참하다는 생각을 하나하나 반박합니다. 그리고 경험과 원숙함, 지식 또는 지혜를 노년의 장점으로 꼽았습니다. 키케로의 말처럼 노인은 삶에서 축적한 경험과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게 쌓인 경험과 지혜가 모두 맞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부분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이 많은 직장 상사와 일을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은 일처리 방식이 너무 구태의연해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에는 놀랄 만큼 신중하면서도 기민한 일처리를 보여주곤 하거든요.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노인이 갖고 있는 경험과 지혜는 그 사람이 현업에서 물러나는 순간 활용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은퇴자의 노하우를 활용할 길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손실이라면 손실인 셈이죠. 정년을 마치고 나온 은퇴자들도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은퇴자가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등산이나 여행 등으로 소일하곤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손실이라면 손실인 셈이죠.

희망제작소에서 2007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행복설계아카데미’가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제작소 박원순 상임이사는 ‘행복설계아카데미’를 구상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의 산업화에 참여한 사람들이 젊은 시절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 다가오고 있다. 경험과 지혜의 세대가 학대당하고 고려장 되고 있다는 얘기다. 봇물처럼 사회로 쏟아지는 퇴직자들을 사회자원으로 활용하는 방법이 모색돼야 한다.”(13쪽)

사용자 삽입 이미지

행복설계 아카데미 교육장면 (사진:임상태)

이런 문제의식 하에 만들어진 게 행복설계아카데미입니다. 행복설계아카데미는 퇴직자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받게 한 후 비영리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하고, 종국에는 비영리단체에 취업하게 하거나, 사회적 기업을 창업하도록 권장하고 돕는 활동을 합니다.


좌충우돌 인생 2막


<고마워라 인생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행복설계아카데미 프로그램과 인연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게 중에는 이 프로그램을 수료한 후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고, 비영리단체(NPO)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으며, NGO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었습니다. 시멘트회사에서 일하다 레미콘회사 사장까지 지낸 박영규씨, 조흥은행 상무이사를 지낸 한석규씨, KBS PD였던 홍순호씨와 그의 아내 전경희씨, 잘나가는 광고인이었던 최혜정씨, 동양제과에서 오래 근무하고 방계회사인 ‘신농상사’ 사장까지 지낸 정하택씨, 중앙부처 공무원이었던 박종학씨 등.

이들은 누가 봐도 성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은퇴도 했습니다. 노후를 행복하게 보낼 만큼의 부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은퇴 후 뭔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한석규씨도 그랬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석규 (사진:강홍수)

“제 삶을 정리해서 자서전을 한 권 쓰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살아온 삶에 자부심을 느꼈고, 그것을 정리하고 싶었죠. 그러나 자서전을 준비하려고 가만히 생각하다 제 족적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은행에서 서류 속에 묻혀 산 32년이라는 시간밖에 없었습니다. ‘책을 쓰면 내가 무엇을 했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 나는 나의 직장과 가족을 제외하고 남을 진정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적이 있는가!’ 하고 반성하게 됐습니다.”(61쪽)

그래서 한석규씨는 행복설계아카데미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고, 지금은 필리핀공동체에서 통역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쉽지는 않았습니다. 사회적 기업이나 NPO 혹은 NGO에서 일하는 것은, 성공한 삶을 살았던 이들에게는 눈높이를 낮춰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보수가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한석규씨는 “눈을 낮추자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순간에 나타나는 몸에 밴 사고와 행동은 제 자신을 자주 열 받게 만들고, 이내 후회의 시간으로 빠져들게 합니다.”라고 말합니다.(74쪽) 남편과 함께 귀농한 전경희씨는 “명함도 불태우고 내가 과거 뭐였다는 생각을 지워야 합니다.”라고 충고합니다.(104쪽)

여주군 자원봉사센터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정하택씨는 이런 말도 합니다.

“제가 구직하려고 하니까 보는 이마다 ‘많이 낮추셔야 합니다. 옛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말의 뜻을 몰랐습니다. 그냥 겸손하라는 얘기인 줄로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제가 일을 구해보니까, 그런 충고는 틀린 말입니다. 낮추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아예 옛날은 없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 배운다고 생각해야 합니다.”(160쪽)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들은 차츰차츰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철거민들의 주거권을 확보하기 위한 운동권 단체에서 만든, 달팽이건설의 상임이사 박영규씨는, 자신의 노하우를 십분 살려 달팽이건설을 주식회사로 만들었습니다.

국제NGO ‘세이브 더 칠드런’에서 일하는 최혜정씨는 광고인의 감각을 살려 ‘신생아 살리기 모자 보내기 캠페인’을 벌여 ‘세이브 더 칠드런’의 활동을 성공적으로 알려 나갔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살려 조직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도 있었지만 힘든 일도,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또 자신이 속해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진입한 만큼 배우는 것도 많았죠.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도 있었고,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상실감과 당혹감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런 것들과 싸워가며, 인생 제2막을 열었습니다.

<고마워라 인생아!>는, 그래서 인생 제2막을 활짝 열어젖힌 이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 제2막에 진입하면서 겪었던 시행착오를 기록한 것이라고 봐야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진솔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전하는 충고가 더 귀에 와 닿습니다.


“밥 보다 더 좋은 희망이 나온다”


중앙부처 공무원을 퇴직한 이후 환경운동연합에서 사진을 찍고, 관리하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박종학씨에게 친구들이 이렇게 물어보곤 한답니다.

“야, 거기서 밥이 나오냐, 술이 나오냐? 살아갈 날이 얼마나 남았다고, 남은 인생 편히 쉬지 않고 뭘 하려고 그런 고생을 하냐.”라고요.(174쪽)

그런 친구들에게 박종학씨는 “밥 보다 더 좋은 희망이 나온다.”고 대답한답니다.(175쪽)

박종학씨는 퇴직 후 10년 동안 자원봉사 생활을 하면서, 전혀 관심 없었던 환경과 생태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다고 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것이죠.

<고마워라 인생아!>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 박종학씨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편히 보낼 수 있는 노년의 삶을 그들은 포기했습니다. 대신, 일하며 사는 노년의 삶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밥보다 더 좋은 희망도 찾았습니다.

이들의 삶은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들의 인생 제2막도 아직 현재진행형입니다. 앞으로 이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 또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종학 (사진:강홍수)

하지만 이들이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이들에게 하나의 모델이 될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퇴한 이들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노인이 잉여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내심 흐뭇하기도 합니다.

인생 1막 이후 밥 보다 더 좋은 희망을 발견한 이들, 그리고 이들이 풀어내는 좌충우돌 인생2막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다보면, 저도 모르게 그 희망에 전염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한 번 뿐인 인생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내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한다는 얘기도 하죠.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제약이 많기 때문입니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고, 자식도 키워야 합니다. 그 와중에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은 묻히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존경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허전한 게 사실입니다. 네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네가 원하던 삶이었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적은 이들에게 그 허전함은 더할 것입니다. <고마워라 인생아!>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 허전함을 새로운 일로 채워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야!”라고 말이죠.

글_ 최을영 (전문기고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을영과 이경희는 언젠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한 철부지 부부이다.
최을영은 전문기고가로 활동하며 월간 인물과사상에 인물포커스를 연재하고 있고,  이경희는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다.
글쟁이가 되고 싶은 소망과는 달리 거실에서 TV를 치우지 못한 소심한 부부이기도 하다.


부부독서가의 행복한 책읽기 목록 바로가기

2009/12/14 00:20 2009/12/14 00:2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book.makehope.org/rss/response/142

Trackback URL : http://book.makehope.org/trackback/142

« Previous : 1 :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 145 : Next »